법무법인 소개

기고문/칼럼

[정선우 변호사] 행정처분의 시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0.12.30 15:20 조회수 : 4599

행정처분의 시효

 

법무법인 세승

정선우 변호사

 

얼마 전 한 정형외과 의사가 행정처분서 한 장을 들고 필자를 찾아왔다. 사연을 들어보니 1996년경 자신의 병원에서 일하던 사무장이 무면허의료행위를 하였고 이를 적절히 관리, 감독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는데, 최근 근 14년만에 의료법위반죄로 처벌받았다는 사유로 의사면허자격정지 2개월의 행정처분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 의사는 자신이 잘못한 것은 인정하지만 당시에 이미 형사처벌과 과징금 처분을 받았는데, 14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자격정지처분을 내리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의료관계 법령에는 행정처분의 시효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위 자격정지처분은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의료관계 법령상의 행정처분은 의료법 위반 등의 행위가 있었던 때로부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경과하더라도 아무런 제한없이 내려질 수 있는 것일까.

 

의료관계 법령상 행정처분을 부과함에 있어 시효가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입법론적으로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국가공무원법, 변호사법 등 의료인이 아닌 다른 전문직역군을 규율하는 법률에서는 징계처분의 시효를 2년 내지 3년으로 제한하고 있고, 형사상 공소시효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경우에도 25년이다. 이와 같이 다른 법령의 시효규정과 비교하여 보면 의료법 위반으로 인한 행정처분을 행함에 있어 장기간 의료인을 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두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의료법 위반행위 등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처분을 부과하지 않은 것은 해당 의료인의 잘못이 아니라 담당 공무원의 업무태만 또는 착오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도 행정기관이 시효가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점을 악용하여 이를 의료인의 불이익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나도 행정편의적인 발상이다.

 

그렇다고 하여 행정처분이 아무런 제한없이 발령되는 것은 아니다. 행정법상 일반원칙으로 "실효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대법원은 실효의 원칙과 관련하여, "실권 또는 실효의 법리는 법의 일반원리인 신의성실의 원칙에 바탕을 둔 파생원칙인 것이므로 공법관계 가운데 관리관계는 물론이고 권력관계에도 적용되어야 함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겠으나 그것은 본래 권리행사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자가 장기간에 걸쳐 그의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의무자인 상대방은 이미 그의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할 것으로 믿을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게 되거나 행사하지 아니할 것으로 추인케 할 경우에 새삼스럽게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결과가 될 때 그 권리행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판시하여 행정법 관계에서도 실효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법률상 행정처분의 시효가 규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위 요건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위법한 행정처분으로서 취소사유가 된다. 그러나 실무상 법원은 실효의 원칙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고, 필자가 알기로는 아직까지 실효의 원칙을 적용하여 의료관계 행정처분이 취소된 판례도 없다.

 

법적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법원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나, 14년만에 자격정지처분을 받은 위 사례의 경우 실효의 원칙이 적용되는 전형적인 경우라고 보아야 한다.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책은 의료법 등 관련 법률을 정비하여 합리적인 시효규정을 두는 입법론적 해결이다. 그러나 아직 이에 관한 논의가 구체적이지 않고 입법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무분별한 행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법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실효의 원칙을 적용하여 불합리한 행정관행에 제동을 거는 수 밖에 없다. 법원의 현명하고 전향적인 판결을 기대해 본다.